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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바우덕이는 매춘부였는가

조작된 신화 - 바우덕이의 실체를 묻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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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영 2009-09-07

 
 <연재 목차>

1. 글머리에 
2. 바우덕이는 실존인물인가
  

3. 바우덕이는 대원군을 만나 옥관자를 하사받았는가 
4. 바우덕이는 꼭두쇠였는가 
5. 바우덕이는 매춘부였는가 


6. 바우덕이는 민중의 희망이었는가  
7. 바우덕이는 안성의 문화역사적 상징인가  
8. 안성에는 그렇게도 추앙할 인물이 없는가 
9. 글을 마치며




3. 바우덕이는 대원군을 만나 옥관자를 하사받았는가 


“(바우덕이가 대원군 앞에서 공연을 하고 옥관자를 하사받은)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안성시에서 펴낸 『남사당놀이』(2006)에 보이는 구절이다. ‘상상하기 힘든 일’을 눈앞의 현실로 만들어내는 일을 안성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능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사실에 근거한 말이 아니다. 그러면 이런 허구가 대체 어디서 기인해 이처럼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유포되고 있는 것일까? 



▲ 대원군의 장례식 모습.  1898년 치러진 대원군의 장례식 사진이다. 김암덕이 실존인물이라고 한다면, 안성시나 안성문화원이 그릇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1848년이 아니라, 대원군이 타계(1898년)한 이 무렵에 출생한 사람이 분명하다.      ©김한영

 
먼저, 다음과 같은 단편의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자.

① 1910-20년 무렵 개다리를 꼭두쇠로 하는 안성개다리패의 유지에 공헌한 사람으로 바우덕이(김암덕)란 사람이 있었다.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1974)*

② 석정리 농기(農旗)는 1865년 경복궁 개축 시 안성사람들이 노역을 나갔을 때 들고 갔던 것이고 지금(1925년)도 보관하고 있다. (김태영, 『안성기략』, 1925)

③ 1865년 경복궁 개축 시 춤꾼과 기녀를 불러 위문공연을 하였다.** (박은식, 『한국통사』, 1915)

④ 1930년대 이래 근대화 과정에서 남사당패가 해체되면서 단원 일부가 석정동농악대 등 지역 토착 농악대에 흡수되었다. (당시 남사당패들의 증언)

이런 몇 가지의 단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조작 과정이 진행되었다. 

우선 ②의 단서를 ④와 조합해서 “을축년(1865) 경복궁 중건 때 … 석정동 농악대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았으니 그 당시 안성지방의 예능을 주도했던 바우덕이의 공로에서 비롯된 게 아니겠는가”라는 첫 번째 허구의 얼개를 만들었다. 20년 전인 1989년 건립한 바우덕이묘의 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글쓴이가 아는 한, 이것이 ‘옥관자 바우덕이’라는 실체불명의 가공인물과 관련하여 안성지역에서 생산해낸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비문은 바우덕이 신화 만들기의 출발점인 셈이다. 이 글은 그래도 양심적이다. 바우덕이가 옥관자를 받았다고 강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부터 두 가지 그릇된 내용을 적시했다. 석정동 농악대가 옥관자를 하사받았다는 것과, 1860년대에 바우덕이가 안성지방의 예능을 주도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 1989년 건립한 바우덕이 묘비. 안성에서 최초로 바우덕이(김암덕)의 이름을 명시한 기록물이다. 이 비문의 기록에는 바우덕이가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나온 기록은 하나같이 바우덕이가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았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인 양 주장하고 있다.     ©김한영

이 말이 사실인지 먼저 대원군 옥관자 하사부터 살펴보자. 

경복궁 중건과 대원군 옥관자 하사라는 엉뚱한 발상은 1925년에 간행된 ②의 『안성기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안성기략』은 물론 1870-90년대에 편찬한 안성의 읍지(邑誌)들 어디에도 석정동 농악대가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았다고 한 기록은 없다. 

그러면 혹시, 당시(1989) 석정동에 전해오던 구전을 채록해서 보충 가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1865년 권력의 최고 실세로부터 지역의 농악대가 정3품의 고관 이상만 패용할 수 있다는 옥관자를 하사받은 “매우 큰 충격을 던져준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그 이후에 편찬된 안성의 읍지들은 물론이고, 안성사람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일꾼으로 참가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안성기략』까지 이 사실을 누락시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무슨무슨 중요한 경진대회에 지역 대표가 참가하여 전국 1등을 차지해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대회에 참가한 사실은 소상히 기록하면서 상 받은 내용은 누락시킬 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따라서 바우덕이 묘비명을 쓸 당시 설사 누군가 옥관자를 받았다고 구술 증언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역사적 사실과 무관할 것이라는 점은 기록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둘째, 당시 안성지역의 예능을 바우덕이가 주도했다는 말도 허구다. 바우덕이(김암덕)라는 이름을 최초로 활자화(活字化)한 ①의 『남사당패연구』에서 보듯, 만일 김암덕이 실존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는 1910-2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비문의 구절이 1년 후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거의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간행된 『안성군지』(1990)에 와서는 매우 대담하고 다채롭게 각색된다. 

▲ 『안성군지』(1990, 714쪽). 경복궁을 중건할 때(1860년대) 바우덕이의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 대원군이 불러올렸다 고 한 후, 뒤에서 1910년 경 바우덕이가 꼭두쇠가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바우덕이는 60대 중반 쯤의 나이에 꼭두쇠가 된 셈이다. 서로 무관한 두 개의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조합하다보니 이런 웃지 못할 모순이 생겼다. 뒤의 참고문헌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 『안성기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성기략』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김한영

『안성군지』의 집필자는 남사당패 말기인 1930년대에 이르러 일부 남사당 단원들이 지역농악대에 흡수되었다는 ④의 증언을 토대로, 1860년대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가 지역의 농악대와 혼융(混融) 습합(習合)되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란 어설픈 전제를 기정사실로 못박는다. 그러나 서슬 퍼런 신분질서에서 밑바닥을 이룬 떠돌이 예인들이 안성의 토착 농악대와 연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더구나 그런 사례를 보고한 자료도 없고, 1900년대 초반 남사당패에서 활동하던 생존자들 가운데 누구도 1930년대 이전에 그랬다는 증언을 한 바 없다. 

여기에 ③의 사실까지 함께 짜깁기하여 대원군이 (당대의 생존인물도 아닌) 바우덕이를 불러올렸다느니, 궁중의 대소신하들이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느니, 일꾼들이 빈지게만 지고 뛰어다녔다느니, 하는 따위의 허구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기에 이른다. 

이 정도면 이것이 정사(正史)의 기록으로서 군지(郡誌)인지, 대하역사소설의 한 대목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이 부분을 누가 집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시 문화원장이었던 최병찬 씨가 집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글의 내용에서 전문기록자의 소양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앞의 연재에서 보았듯이, 이런 내용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전현직 문화원 대표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바우덕이는 꼭두쇠였는가 


사실 김암덕이 꼭두쇠였는가 아닌가는 그리 의미 있는 논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왕 실체를 더듬는 자리이니 이 문제 또한 함께 검토해보기로 하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헌에 등장하는 김암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묘비명의 기록보다 15년 앞선 1974년이다. ①에서 소개한 『남사당패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인 심우성 선생이 50여 년 전 4회에 걸쳐 청룡리를 찾아 당시의 생존자들로부터 구술을 채록하여 정리한 독보적인 필드리서치 연구서로, 그동안 김암덕에 관한 오리지널 소스, 즉 원전(原典) 역할을 해왔다. 원전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여기에 등장하는 김암덕 관련 내용은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내용이어서 한 인물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매우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모두 구술증언이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인 심우성이 당시(1950년대 말-1960년대) 생존해 있던 남사당 단원들과 청룡리 마을주민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당(社堂, 寺黨)들은 연희(演戱)와 매춘을 했다.

(2) 1910년 경 안성에는 ‘개다리패’라 불린 남사당 패거리가 있었고, 이 패거리에는 능력 있는 사당 김암덕이 있었다. (누구의 증언인지 확인 불가)

(3) 김암덕의 거사였던 이경화를 비롯한 안성 일대의 남사당패들은 (1890-1910년대 활동한) 이운선(李雲仙)에게서 배웠다. (양도일 남형우 최성구 정일파 송순갑 등의 증언 ― 이운선은 1910년 무렵 원각사[1908년 설립]에서 공연한 바 있고 남사당 진위패에 속한 가면극의 명인이다.)

(4) 김암덕은 조정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개다리패의 후예인 복만이패 소속 정일파[1901년생]의 증언)

(5) 이경화는 김암덕의 도움을 받아 개다리패의 초입자들에게 덧뵈기 연희를 가르쳤다.

(6) 연희자 중 최성구 양도일 남형우 정일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이들의 전 꼭두쇠 바우덕이의 명성은 대단했다. (마을 주민 이시용[1902년 생]의 증언)

(7) 김암덕은 20대 초반인 1920년경 병사했다. 

김암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인 50년 전의 이 구술 증언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암덕이라는 사람은 대원군이 아관파천 이후 실각하여 양주에 은거하다 타계한 1890년대 말엽(또는 그 직후)에 태어나 1910년대에 활동하고 1920년대 초반에 사망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김암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  『안성기략』(1925). 20세기 초반의 안성 사정을 훤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책자다. 이 책은 김암덕이 활동했던 직후 쓰여졌을 뿐 아니라, 당시 안성에 있던 자전거 인력거 수자까지 소상히 소개할 정도로 기록정신이 돋보이지만, 김암덕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 안성참빛교육사료관 소장본.   © 김한영

이 기록에서는 먼저 세 가지가 눈에 띈다. (2)에서 저자는 김암덕을 ‘능력 있는 사당’이라 묘사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마디 뿐이다. 누구의 증언인지도 알 수 없고, 그 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6)에서 당시의 마을 주민은 김암덕이 꼭두쇠였고 명성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20-30년대 직접 가담해 활동한 단원들(양도일 남형우 최성구 정일파 송순갑)은 이 책 어디에서도 김암덕을 꼭두쇠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주민은 또 김암덕의 명성이 대단했다고 하지만, 지난 연재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안성에서 태어났거나 기록물을 남긴 사람들 누구도 “명성이 대단”했다는 김암덕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말한 이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방증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4)는 당시 남사당패 단원의 증언이기에 주목할 측면이 있다. 이 한마디 외에 상황을 파악할 다른 어떤 추가증언도 제시된 게 없지만, 일단 이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조정이 어쨌든 ‘대원군의 조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증언을 가지고, 조정이 ‘도성’(=서울)을 뜻하는 것인지, ‘궁성’을 뜻하는 것인지, 대원군의 거소였던 ‘운현궁’을 뜻하는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드나든 것인지에 대해서 도무지 파악할 방도가 없다. 김암덕이 조정을 드나들었다면 그 시점은 1910년대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무렵이면 이미 조정은 없어진 시기이다.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취록자(심우성)도 김암덕이 조정에 드나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흥미로운 얘기일 법한데도) 이유, 시기, 목적 등 이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던가 보다. ‘조정에 드나들었다고 한다’는 짧은 한마디 외에는 이 책에서 그에 대한 다른 정보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조정에 드나들었다고 한다’는 증언은 귀에 담아둘 만한 얘기가 아니라고 판단해도 좋을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1910년대에 활동한 김암덕이 자신이 속한 패거리 내에서 나름대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 『남사당패연구』(1974). 공주민속극박물관 심우성 관장이 1950년대 말부터 현장을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해 집필한 독보적인 필드리서치 연구서다. 여기에 최초로 김암덕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1910-20년대 안성에 ‘개다리’라는 별명을 사용한 사람을 꼭두쇠로 한 개다리패가 있었는데 김암덕이 이 패거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그 요지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안성에서 태어났거나 안성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일부 연희자들(이수영, 김기복)은 바우덕이(김암덕)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증언했다. 이는 김암덕이 20세기 초반의 실존인물이긴 하되, 어느 영역이건 역사와 문화의 지평에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진 ‘의미 없는 개인’ 중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감하게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김한영


그런데 한 가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꼭두쇠는 아니었을지라도 패거리 내의 능력 있는 구성원이었고 명성이 대단했다는데, 왜 김암덕이 사망한 직후 남사당패에 참가한 이수영****과 안성 농악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기복은 김암덕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걸까? 

김기복 옹은 김암덕과 나이 차이가 불과 한 세대(약 30년)밖에 안될 뿐더러, 같은 지역(안성), 같은 분야(전통연희)에서 활동한 분이다. 그래서 이 분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들어서 증언한 이들이 하나같이 김암덕보다 훨씬 더 이전의 사람이 분명한 이운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수영 김기복이 김암덕이란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시 안성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김기복 옹의 증언은 앞서 전거를 제시한 것처럼 『경기민속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혹시 바우덕이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그래 온 것처럼, 다른 입장을 가진 누군가가 김 옹이 직접 구술하지 않은 내용을 꾸며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우덕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 김 옹의 증언은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구술 내용을 취록하고 정리한 사람이 다름아닌 안성시 문화체육관광과의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은 안성에 남아 있는 역사기록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문학작품들 어디에도 바우덕이나 김암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바우덕이가 그렇게 유명했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설가 이봉구(1916-1983), 시인 박두진(1916-1998) 조병화(1921-2003) 등 안성이 고향인 문학인들은 이 소재를 어떤 형식으로건 문학적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안성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담아낸 시편들을 남기기도 한 두 시인이 나서 자란 고향 안성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매우 매력적인 영감과 상상력의 소재로 여겨 마땅히 시적 언어로 표현했음직한데도 바우덕이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원각사. 1910년 무렵의 모습이다. 개화기 경기 일대 남사당패거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운선이 공연을 한 곳이다. 이운선은 김암덕의 거사였던 이경화를 가르쳤고, 그에게서 배운 이경화는 김암덕과 함께 청룡리에서 초입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안성남사당 기예의 뿌리는 이운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김한영


1910년대에 활동했다고 하는 김암덕의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에 와서 가늠할 길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가 과연 꼭두쇠였는가 하는 점 또한 김암덕 사후 40년이 지난 1960년 무렵 (남사당 단원이 아니라) 마을 주민 한 사람의 증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을 얻기 어렵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글쓴이는 김암덕이 1910년대에 활동한 실존인물이긴 하되, 그 기예와 명성이 그동안 미화되고 포장된 것과 달리, 동네축구 수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네축구팀에도 나름대로 공을 잘 차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후대의 누군가가, 그 무렵 아무개가 공을 잘 찼다고 증언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5. 바우덕이는 매춘부였는가 


김암덕과 그 패거리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서 가장 껄끄럽고 조심스러운 점이 바로 이들의 매음(賣淫)에 관한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들의 매춘행위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의 삶이 천형의 굴레처럼 떠안아야 했던 전통사회의 구조적 특수성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한 인간의 사생활이기 이전에,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 또한 마땅히 구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암덕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학계의 거장 이능화(李能和)도 같은 생각이었던가 보다. 아래의 노래는 김암덕이 사망한 직후인 1927년에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진 「여사당 자탄가」(女社堂自歎歌)의 한 구절이다. 김암덕과 같은 사당들이 매춘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렀던 노래를 취록한 것이다.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네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


1930년대 민속조사를 위해 어쩌면 청룡리도 방문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도 “광대 사당 남사당을 싸그리 일컫는 전통연희자 가운데 특히 사당은 매춘을 하며...”(「전승음악과 광대」)라고 보고하고 있고, 남사당패의 패륜패속(悖倫敗俗)을 애정으로 감싸던 심우성도 이들이 수시로 매춘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심우성의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 송석하의 말을 한 구절 옮겨보자. 

“사당을 뜯어먹고 생활하는 거사(居士, 요즘 말로 기둥서방을 이른다)란 사람이 있는데 평시에는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가 매춘을 시킬 경우에는 슬그머니 내보내며, 그 수입은 자신이 수령하여 일부는 사당의 화장이나 의복 비용으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취한다.”


▲   『한국민속고』. 1930년대 집중적으로 집필한 송석하 선생의 여러 글들을 모아 1960년에 간행한 책이다. 당시로선 드물게, 지배계급이 천시했던 민속과 연희를 주제로 한 이 책에서 송석하 선생은 구체적으로 안성 청룡사를 언급하며 (남)사당패거리들에 대한 보고를 담고 있지만, 역시 이 책 어디에서도 김암덕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김한영


여사당 김암덕은 같은 패거리의 동료였던 남사당 이경화를 거사로 두었다 한다. 그렇다면 김암덕과 이경화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문란하고 난잡했던 사당패들의 생활과 달리, 예외적으로, 고결한 사랑을 나눈 사이였을까? 실상이 이러할진대, 이들의 관계를 과연 “이루어질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안성시 홍보자료)라고 미화하는 것은 대체 말이 되는 걸까? 

다음호에서는 김암덕과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안성)에서 살았던 다른 두 여인의 경우를 김암덕과 대비해 보면서 이 문제를 계속 이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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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990년에 재판이 나왔다. 글쓴이는 1974년의 초판이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이를 참조했다.

** 여기서 말하는 ‘춤꾼과 기녀’는 남사당패와 같은 유랑예인집단이 아니라, 관기(官妓)들이거나 관청에 소속 또는 연계된 재인(才人) 창우(唱優)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 이 책에 보이는 기록만으로는 일꾼들이 농기를 가지고 간 것은 분명하지만 농악패까지 함께 간 것인지, 그래서 석정리농악패가 경복궁 공사현장에서 공연을 벌여 일꾼들을 위무한 것인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 남운용 양도일 등 최후의 남사당 패거리들과 함께 활동한 연희자.



김한영 (안성참빛교육사료관)
 
 


기사입력 : 200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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