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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의 수요일마다
거기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현장을 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
황윤희 기자   |   2013-11-26

우리 고장 안성에 의미 있고 소중한 공간이 생겼다. 금광면 상중리 석남사 가는 길 입구에 자리한 이 집에는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작은 연못을 품은 근사한 전원주택인 이 집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었던 할머니들의 쉼터가 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 10억원의 돈을 지정 기부했고, 이 기부금으로 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25일에는 그래서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 개소식이 열렸다.

▲ 개소식에 참여한 분들.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이곳이 미래세대와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는 곳, 또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이 치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 안성신문
 
현재 위안부 할머니들은 전국에 56명이 생존해 계시다. 하지만 모두 80세 이상의 고령으로 절반 이상의 할머니들이 요양병원에 계시는 상황이다. 때문에 이날 개소식에는 96세로 가장 고령이신 이순덕 할머니와 김복동, 안점순, 길원옥 할머니, 이렇게 네 분이 참석하셨다.

일본군 ‘위안부’란 1930년대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군 위안소’를 설립해,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든 ‘범죄’를 말한다. 1930년대 초, 일본군에 의한 강간사건 등으로 일제는 전쟁수행에 차질을 빚는다. 점령지에서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던 것. 이에 일제는 ‘위안소’ 제도를 도입, 침략지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연행 당시 나이는 11세에서 27세였고, 대다수가 취업사기나 유괴, 납치 등의 방식으로 동원되었다고 한다.(무심결에 쓰고 있는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종군’에는 자발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끌려간 이들은 아시아와 중국 전역의 전쟁터에서 패전 때까지 성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이들은 마음대로 위안소를 떠날 수 없었고 생활도 통제를 받았다. 정부가 추정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인원은 8만에서 20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2011년을 기준으로 한국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는 총 234명뿐이다. 정부가 피해자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기도 했지만 패전과 함께 위안부들은 현지에 버려지거나 폭격으로 사망, 혹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남은 생존자들도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고난에 직면해야 했고, 일부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돌아와서도 위안소에서 받은 구타와 고문, 성폭력으로 인해 평생 치유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가정을 이루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평생 여러 심리적 후유증을 안고, 주위의 시선과 편견 속에서 긴 세월을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 가장 고령이신 이순덕 할머니(96세).     © 안성신문

그러한 침묵이 깨어진 것이 해방 후 40년도 더 지난 1988년이다. 한 세미나에서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되어 일본정부를 향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함으로써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매주 수요일 정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참여하는 수요시위가 열린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이 수요시위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 1998년 1월 8일이다. 지금까지 15년을 이어온 것으로,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시위에는 수많은 여성단체와 사회단체, 종교계, 일반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요즘은 학생들의 참여가 유독 많아 많이 모일 때는 1천 명 가까이 모인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평화운동가, 여성운동가로 거듭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피해자의 신분을 넘어, 스스로 일본정부를 향해, 세상을 향해 명예회복을, 역사적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안점순(86세) 할머니는 개성이 고향이다. 할머니는 열네 살에 마구잡이로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중국에서 위안부로 살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 이야기를 여쭈니, 생각하면 눈물 난다고 말을 아끼셨다. 안 할머니는 쉼터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었다. “안성이 반갑다”고, “위안부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되도록 힘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또 “우리 일이 빨리 해결이 나야 여기 와서 살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할머니들이 당장 쉼터에 와서 생활하지는 못하는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집회에 나가고, 수시로 이곳저곳을 방문해 강의 등을 진행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만 이곳 쉼터에 둥지를 틀고 평화로운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 안점순 할머니는 열네 살에 마구잡이로 트럭에 실려 끌려가 위안부로 살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 안성신문

올해 88세 되신 김복동 할머니는 경남 양산이 고향이다. 열다섯 살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남양군도를 떠돌아야 했다. 평생 홀로 사신 할머니는 “수십년 간 집 한 칸 없이 살다가 이런 쉼터가 생겨나 꿈만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고 기대치가 있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외나 나다닌다고 호통을 치셨다. “과거사를 깨끗이 밝혀야지. 우리가 돈 벌기 위해 스스로 일본군 쫓아갔다는 말이 너무 억울해. 법에 입각해서 제대로 해결해달라는 건데 대통령이 당선된 후엔 나 몰라라 하니 우리가 누굴 믿겠어?”

정대협과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렇다.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당연히 이뤄졌어야 할 이 일들이 해방 뒤 70년이 다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은 전범이니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정부는 그동안 무얼 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정대협에서는 나비기금을 모으고 있다. 나비기금은 전 세계의 전시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해 조성되는 기금이다. 나비기금이 만들어진 것은 앞서의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 덕분이다. 두 분은 지난해 일본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전시 성폭력 피해여성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뜻을 따르고자 나비기금이 만들어진 것으로, 할머니들은 정부로부터 매월 받는 지원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보태고 있기도 하다. 현재 나비기금은 아프리카 콩고로,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활동하면서 세계 도처를 다니다 보니 우리만 피해자가 아닌 걸 알았어. 아파본 사람이 아픈 마음을 안다고 뭐든 도울 게 없을까 생각 끝에 나비기금을 만들게 된 거지. 안성에서도 나비기금을 모아서 도울 수 있었음 좋겠어.” 김복동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피해자에서 그 피해를 보듬고 치유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할머니의 말대로 안성에서도 나비가 날았으면 좋겠다.

▲ 김복동 할머니는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고 기대치가 있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외나 나다닌다고 호통을 치셨다.     © 안성신문

평화와 치유의 집은 안성신문 운영위원장이기도 한 김운근 대표가 운영하는 금호스틸하우스에서 지었다. 또 주인을 기다리던 집과 쉼터를 찾던 정대협을 연결해준 것이 안성신문 이규민 대표이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돼 있다고 이렇게 저렇게 연이 잇닿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안성에 오셨다. 모두의 말대로, 반갑고 기쁜 일이다. 개소식에서 지강 스님은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자신이 또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할머니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면서 법문보다 더 좋은 노래를 전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스님은 앞으로 매월 50만원씩을 쉼터 운영비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2011년 12월 14일에는 1천 번째 수요시위가 열렸다. 그를 기념하고자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는 평화비가 세워졌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앳된 소녀와 빈 의자를 형상화한 동상이다. 소녀는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의 할머니들의 모습이고, 그 곁의 빈 의자에는 함께 연대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빈 의자, 거기에 앉아 소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봐주는 것, 연대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수요집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부나 늘 열린다. 명절이거나 휴일이거나 상관없이 늘 수요일이다. 그렇게 16년을 건너왔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지 않을까? 십대 소녀였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오늘까지도 어딘가 안주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리에 서있는 중이다. 그 기나긴 질곡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이 땅 모든 국민의 아픔이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집안의 기울어진 기둥을 바로 세우는 것처럼 중차대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친일 교과서를 검정해주고 있는 마당이니, 일본 극우세력이 일삼아 ‘망언을 날려도 괜찮겠네’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안성이 할머니들 곁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한다. 안성은 예로부터 불의에 민감하고 의협심 넘치는 동네였으니 말이다.

황윤희 기자 94867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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