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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 “오월에서 통일로, 평화를 노래하다”

경기청년연대와 함께 한 5.18광주민주화항쟁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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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욱 기자
기사입력 2016-05-18

 

 

▲ 5월 14일, 5.18광주민주묘지를 찾은 경기청년연대 회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 안성신문

 

 

대한민국의 오월에는 슬픔과 분노가 서려있다. 1961516일 박정희 당시 소장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희생이 무색하게 독재자 박정희의 사망 후 전두한 독재시대가 도래한다.

 

그렇게 이어진 독재는 1980518일 독재타도를 부르짖던 광주시민들을 총과 칼로 무참히 학살한다. 당시 언론은 광주민주화항쟁을 북에 지침을 받은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왜곡하고, 당시 국정화된 교과서는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거짓을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가르쳤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시대에 시민들은 또 다른 독재, 그 독재에 길들어진 언론, 무자비한 국가폭력, 노동탄압, 한반도긴장사태유발, 자주국방포기 등에 맞서 그날의 광주시민처럼 싸우고 있다. 5.18광주민주화항쟁 36년이 지난 2016514, 40여명의 경기청년연대 소속 회원들도 5.18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광주로 떠났다.

 

 

 

▲ 5.18광주민주화항쟁에서 희생된 아들을 기리는 문구가 5.18광주민주묘지 묘비에 새겨져 있다.     © 안성신문

 

  

그들을 기억하다

 

경기청년연대는 5.18민주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광주일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동행 취재한 취재진에게 우리(경기청년연대)들 이야기보다 여기 묻히신 민주열사분들의 사연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묘역 설명을 맡은 한 청년은 무자비한 국가폭력으로 소중한 목숨을 잃은 5.18민주열사분들을 많은 시민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라며, “5.18정신계승은 우리가 그날을 알고, 그날을 잊지 않는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라고 전했다. 이에 경기청년연대가 5.18광주민주묘지에서 설명한 민주열사들의 사연을 간추려 봤다.

 

김경철 열사.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는 5.18 당시 29세의 장애인노동자였다. 5.18 최초 희생자인 김경철 열사는 금남로 지하상가에서 공수부대에 붙들렸다. 말을 못하는 그는 공수부대원에게 농아신분증을 보여주며 손짓 발짓으로 자신은 그저 평범한 시민임을 전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어깨·엉덩이·허벅지가 부서지고 으깨진 김경철 열사는 519일 숨을 거뒀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말을 못했다는 것 하나였다.

 

 

당시 19세로 춘태여상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금희 열사. 이 여학생은 521일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박금희 열사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계엄군은 헬기에서 그녀에게 총탄을 발사했고, 무차별 총탄세례를 받은 그녀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박금희 열사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뒤늦게 망원동에 묻혔다.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아래 그녀의 친구들은 묘소를 찾아가지도 못했다. 친구들은 1987년까지 매해 521일 돌아오면 그녀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곳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친구 금희를 만났다.

 

학생들이 맞는 것을 보고 항쟁에 참여한 건축노동자 조사천 열사. 그는 521일 도청에서 목에 총을 맞고 눈을 뜬 채 숨졌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중 아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의 주인공이 당시 다섯 살이었던 그의 어린 아들이다. 사진 속 어린 아들은 19986월부터 5.18광주민주묘지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비롯한 5.18광주민주화항쟁 희생자들을 돌보고 있다.

 

 

 

▲ 5.18광주민주묘지에 묻힌 민주열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경기청년연대 회원들.     © 안성신문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계엄군에 총에 맞고 사망한 최미애 열사. 당시 25세였던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다. 최미애 열사를 쏜 군인은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사실을 알면서도 총을 발포했다. 태아는 최미애 열사가 숨을 거둔 후에도 20여분간 그녀의 뱃속에서 살아 있다가 사망했다. 현재 그녀의 묘비에는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부인을 떠나보낸 남편이 피눈물로 새긴 이별가가 남겨있다.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넋.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오월의 노래’. 이 노래의 주인공은 당시 20살의 손옥례 열사이다. 그녀는 5.18 당시 가장 잔인하게 희생됐다. 그녀는 계엄군의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진압봉에 두들겨 맞아 온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진 후 아랫배에 수십 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그녀의 동생 손병석씨도 518일 교회를 가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두들겨 맞았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아직도 군인들을 보면 덤벼들어 싸우는 등 그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한 당시 31세의 윤상원 열사. 그는 518일부터 27일까지 민주항쟁을 이끌었다. 527일 도청에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윤상원 열사는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는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고 전하며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남은 150명의 시민군과 마지막 항전을 준비한다. 527일 특공대는 도청 안으로 진입했고 윤상원 열사는 사망한다. 그는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시작을 이끈 지휘자였고, 5.18광주민주화항쟁의 끝을 함께했다.

 

 

▲ 경기청년연대 회원이 윤상원 열사 묘지 앞에서 묵념을 드리고 있다.     © 안성신문

 

    

그 길에 서다

 

5.18광주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경기청년연대는 5.18광주민중항쟁 정신계승 행진에 참가했다. 행진은 광주민중항쟁의 주요항쟁지인 구)전남도청-금난로-YMCA옛터를 지나는 2.6구간에서 이뤄졌다. 청년들은 한반도평화를 외치며 민주화항쟁 선배들이 1980년 지나간 길 위를 2016년 다시 걸었다.

 

광주시민들은 청년들의 행렬이 지날 때마다 환호하며, 잊지 않고 광주를 찾아준 청년들을 응원했다. 일부 광주시민들은 청년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참혹했던 당시상황을 직접 설명해주기도 했다. 광주경찰은 행진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금난로 왕복 6차선 중 3차선 도로를 모두 통제해 줬으며, 중앙선에 5m 간격으로 경찰을 배치해 혹시 발생할지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했다.

 

행진에 따른 교통통제로 차량통행에 불편함이 있음에도 차량운전자들은 오히려 행진에 참가한 청년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광주시민 김모(54)씨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먼 광주까지 찾아준 청년들이 너무 기특하고 고맙다,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 일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도 모두 현재 진행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5.18광주민주화항쟁 민중대회에 참가한 경기청년연대 회원들이 '한반도 평화협정체결'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안성신문

 

 

경기청년연대는 행진과 별도로 민주화항쟁지를 순례하는 시간도 가졌다. 청년들이 찾은 전남대학교, 통일회관 앞, )전남도청,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옛터, 광주역광장, 금난로, )한일은행 사거리, 5.18민주광장, 농성광장, 광주공원광장, 가톨릭센터, 광주YMCA 옛터, 광주MBC 옛터, 녹두서점 옛터, )상무관, )광주적십자병원, 대인시장, 양동시장, 무등경기장, 유동삼거리 등은 모두 치열했던 당시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전남대학교는5.18광주민주화항쟁 발원지이다. 계엄군은 1980517일 전남대 안으로 진입, 도서관 등에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했다. 이 같은 계엄군의 행위는 5.18광주민주화항쟁의 불씨가 됐다. 통일회관 앞 도로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최초로 총을 발포한 곳이다. 광주역광장은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시민 수십만 명이 민주화항쟁 동참을 위해 모여든 항쟁지이다.

 

519일 계엄군은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난입해 시민들에게 총칼을 휘둘렀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이용, 무사히 시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을 통해 곳곳에 전파됐다. 녹두서점에 모인 사람들은 투사회보를 제작해 민중항쟁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또한 YMCA에 입주한 CBS방송은 당시 자행된 군부의 불법 탄압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광주MBC는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520일 광주MBC 건물을 불태우며 왜곡언론을 심판했다.

 

민주화항쟁 당시 금난로는 항쟁·민중·민주의 거리였다. 5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기 전까지 매일 30여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항쟁을 벌였다. 가톨릭센터는 학생들의 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전남대학교에서 쫓겨 온 학생들은 이곳에서 항쟁을 이어갔다. 전남도청은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시작과 끝을 알린 곳이다. 민주화항쟁 본부가 있던 전남도청은 민주화항쟁의 시작이었고, 윤상원 열사을 비롯한 150여명의 마지막 결사항전도 전남도청에서 이뤄졌다.

 

민주화항쟁 당시 적십자병원 의료진들은 부상자들을 살리기 위한 헌식적인 활동을 펼쳤다. 수많은 부상자로 적십자병원에서 보유한 피가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헌혈에 동참했다. 19805월 적십자병원은 뜨거운 시민정신이 넘쳐났다. 상무관은 희생자의 시신이 모셔있던 곳이다. 계엄군은 이곳을 점령한 후 당시 상무관에 모셔진 126구의 주검을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 시립묘지에 매장했다.

 

광주시민들은 민주화항쟁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내놓았다. 대인사장과 양동시장 상인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눠주며 항쟁을 도왔다. 큰 가마솥을 걸어 밥을 지었고, 상점에 있던 생필품을 들고 나와 시민군에게 전달했다. 김남주 시인의 주먹밥에는 당시 상인들의 대동정신이 담겨 있다. 광주공원광장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시민군을 편성, 사격훈련을 실시한 곳이다. 민주화항쟁 당시 이곳은 시내 순찰과 치안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 5.18광주민주화항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피켓 뒤로 5.18민주화운동기념관이 보이고 있다.     © 안성신문

 

  

같은 곳을 보다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결사항전을 준비하던 윤상원 열사는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결국 계엄군에 도청이 함락당할 것도 알았다. 그러나 당시 31세의 청년 윤상원 열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1980년 청년 윤상원은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을 2016년 청년들이 찾아 1980년 윤상원 열사와 같은 길 위에서 같은 곳을 바라봤다. 윤상원 열사가 말한 승리는 광주민주화항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광주를 찾은 현재의 청년들일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던 자신처럼 2016년 거리에서 부패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청년들이 있는 한 5.18광주민주화항쟁은 승리한 민중항쟁이다.

 

5.18광주민주화항쟁 순례를 마친 한 청년은 당시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윤상원 열사처럼, 시민군처럼 끝까지 항쟁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봤다, “오늘날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선배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는지 새삼 깨달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청년은 이번 순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들의 희생이 부끄럽지 않게 이 땅에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겠다고 전했다.

 

 

▲ 경기청년연대 회원들이 5.18광주민주화항쟁 정신이 담긴 합창을 하고 있다.     © 안성신문

 

유병욱 기자 asmak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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